[칼럼] 화분 속 화초와 원료의약품의 생명력;여재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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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속 화초와 원료의약품의 생명력

— 경계에 꽃을 피우려면 산업의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

가톨릭대학교 의생명과학과 교수 여재천 jcyeoid@gmail.com

추분이 지나고 백로가 지나면 화분 속 화초도 계절을 안다. 한여름의 무성함이 조금씩 가라앉는가 싶더니, 오히려 작은 새순 하나가 올라온다.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1970년 춘천집 화단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분명히 그때의 화단은 아니다. 그런데 시간은 기억 속의 계절을 다시 정리한다.

어린 시절 보았던 꽃과 흙, 담장과 나무가 오늘의 화분과 겹쳐진다. 자연은 한곳에 머물지 않지만 생명은 끊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자유의 제약은 자연의 순응인지도 모른다. 화분은 식물의 뿌리를 일정한 공간 안에 묶어두지만, 그 안에서도 뿌리는 길을 찾고 새순은 위로 올라온다. 중요한 것은 화분의 크기만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흙이 있고, 물과 햇빛이 어떻게 공급되며, 뿌리가 숨 쉴 공간이 있는가이다.

도심 한옥의 계절 변화와 화분 속 화초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의 모습을 떠올린다. 특히 원료의약품이다. 완제의약품은 환자가 직접 만나는 결과물이지만, 그 약을 만드는 산업의 뿌리는 원료의약품에 있다. 아무리 뛰어난 신약을 개발하고 세계적인 허가를 받더라도 핵심 원료와 중간체, 원부자재, 생산설비와 제조기술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 산업의 생명력은 오래가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가격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값싼 원료를 해외에서 조달하면 생산비를 낮출 수 있고,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경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달라졌다. 전쟁과 무역 갈등, 수출통제, 물류 차질, 공급망 재편은 ‘싸게 사는 것’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의약품은 일반 공산품과 다르다. 필요할 때 없으면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원료의약품은 이제 단순한 제조원가의 문제가 아니라 보건안보와 산업안보가 만나는 영역이 되었다.

과거의 산업구조를 돌아보면 우려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2013년 381개사였던 원료의약품 생산 제약기업은 2018년 119개사로 크게 감소했고, 같은 기간 원료의약품 수입액은 증가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원료의약품 수입 역시 크게 늘었다. 이 통계는 이미 오래된 자료이지만, 당시 우리 산업이 값싼 해외 조달에 의존하면서 국내 생산 기반이 약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문제는 그때 우리가 무엇을 놓쳤느냐이다. 원료의약품은 단순히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다. 합성·정제·결정화·분리·분석·품질관리와 같은 제조기술이 축적되고, 설비와 전문인력이 성장하며, 공정개선과 CMC 역량이 쌓이는 산업이다. 즉 원료의약품 산업은 신약개발의 제조 기반을 구성하는 기술산업이다. 신약개발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면 원료의약품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악기의 음을 맞추는 파트와 같다. 관객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느 한 파트의 음이 흔들리면 전체 연주는 흔들린다.

이제 정부의 정책도 이러한 관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 최근 정책에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2025년부터 의약품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선도사업자를 선정하고 있으며, 2026년에도 경제안보 품목의 원활한 도입과 생산을 위한 공급망 안정화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원료의약품 자급화 정책도 과거보다 넓어지고 있다. 2025년 3월부터는 신규 등재되는 국가필수의약품 가운데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경우, 반드시 제약사가 원료를 직접 생산하지 않더라도 약가 우대가 가능하도록 제도가 확대됐다. 수급불안정 의약품의 생산설비·장비 구축 지원도 확대되고 있다. 2026년에는 원료 구매 다변화, 핵심의약품 비축, 수급불안정 의약품 생산 지원, 제조 선진화 등 공급망 안정 관련 정부안이 2025년보다 크게 확대됐다.

이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원료의약품 정책을 국산화 정책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국산화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핵심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필요한 원료에 대해 언제든 생산을 재개할 수 있는 기술과 시설, 인력, 품질관리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동시에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공급처를 다변화해야 한다. 말하자면 100% 국내 생산이 아니라 100% 공급망 통제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국가가 모든 원료의약품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경제안보와 보건안보 측면에서 핵심 품목을 선별해야 한다. 둘째, 단순 생산시설 투자보다 공정기술과 CMC, 품질관리, 분석기술에 대한 R&D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한 바이오벤처가 실제 의약품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제조와 품질관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셋째, 원료의약품 기업이 일정 규모 이상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비투자·세제·금융·장기구매를 연계한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넷째,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바이오벤처와 원료의약품 기업을 연결하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신약 후보물질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실제 생산 가능한 의약품으로 전환할 제조 파트너가 없다면 기술은 연구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다섯째, 정부 조달과 국가필수의약품 정책에서도 단순히 최저가격만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급 안정성, 국내 생산능력, 공급망 다변화, 기술혁신 등을 함께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근 약가제도 역시 이러한 산업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2026년 하반기부터 제네릭과 특허만료 의약품의 약가 산정체계를 조정하면서 품질관리와 의약품 수급안정, 혁신성을 중요한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약가를 낮추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국민의 약품비 부담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정책 목표다. 그러나 지나치게 낮은 가격이 국내 제조 기반의 붕괴와 공급불안을 초래한다면 결국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 보건경제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싼 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가격의 안전한 약이다. 여기서 정책의 균형점이 필요하다.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면서도 필수의약품과 원료의약품의 생산기반이 유지될 수 있도록 가격과 공급망, 산업경쟁력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시장에서 가격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보건안보의 가치를 정책가격에 반영하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화분 속 화초도 마찬가지다. 화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더 많은 물을 부을 수는 없다. 햇빛이 부족하면 햇빛을 주어야 하고, 뿌리가 꽉 차 있으면 화분을 바꾸어야 하며, 흙이 낡았다면 새로운 토양을 넣어야 한다. 산업정책도 그렇다. 기업에 돈만 지원한다고 산업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산업의 뿌리가 어디에서 막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원료의약품 산업도 이제 보조금 중심의 단편적 지원에서 기술·금융·조달·약가·인허가·수출을 연결하는 전주기 산업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진 원료의약품 기업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국내 시장에 원료를 공급하는 기업이 아니라, 세계적인 제조기술과 품질관리 능력을 갖추고 글로벌 제약사와 바이오벤처의 신약개발 과정에 참여하며, 필요하면 자체 기술로 해외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업이다. 그러한 기업이 몇 곳만 제대로 성장해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원료의약품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완제의약품 생산이 안정되고, CMC 역량이 강화되며, 국내 신약개발 기업의 글로벌 허가 가능성도 높아진다. 결국 원료의약품은 신약개발의 후방산업이 아니라 글로벌 신약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산업 기반이 된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경계는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국내 생산과 해외 조달의 경계, 연구와 제조의 경계, 바이오벤처와 제약기업의 경계, 정부와 시장의 경계에도 꽃은 필 수 있다. 다만 꽃을 피우려면 경계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 아래에 있는 뿌리를 살펴야 한다. 추분이 지나고 백로가 지나 화분 속 화초는 새 생명을 담고 있다. 1970년 춘천집 화단의 기억도 어느새 오늘의 화분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재정리하지만 생명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뿌리가 살아 있어야 새순이 올라온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신약을 꿈꾼다면 이제는 그 신약이 자랄 수 있는 산업의 토양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원료의약품은 그 토양의 일부다. 그리고 지금은 그 토양을 다시 가꾸어야 할 때다.